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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49 BC, Julius Caesar crosses the Rubicon, signaling the start of civil war

 

기원전 4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다. 이는 내전의 시작을 뜻하는 것이다.

 

그 유명한 카이사르의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발언이 나온 사건입니다. 로마 근교의 루비콘 강을 건넌다는 것은 로마의 원로원과의 전쟁을 뜻한다는 얘기. 그래서 카이사르는 승부를 걸게 됩니다. 카이사르의 수많은 전투들 중에서 루비콘 강을 건너는 그 부근의 얘기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루비콘강

1. 폼페이우스

일단 폼페이우스가 등장한 배경을 알아봐야 겠습니다.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이후로 공평한 부의 분배를 시도한 집정관들이 모두 암살당하자, 공평한 부의 분배를 요구하던 로마의 동맹시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때 18세의 폼페이우스는 카리스마적인 인기를 가지고 있었고, 훌륭한 부대 통솔력을 보여주어서 이시기에 이미 정치인들에게 주목을 받게 됩니다. 동맹시 내전이 끝나고, 로마는 정치적 혼란기에 접어듭니다. 이 시기에 폼페이우스는 지중해 부근의 해적을 훌륭하게 소탕하고, 또한 스페인 원정까지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어서 로마내에서의 인기가 더 높아지게 됩니다.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한 대부호였던 크라수스에게 집정관을 자격을 부여합니다. 특히 폼페이우스는 연령제한에 8살이나 미달이었는데도 불구, 집정관에서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어보임으로써 집정관 당선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지중해의 해적을 완전히 소탕해 버리죠. 이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오면 그야말로 로마의 1인자는 폼페이우스가 되는 상황….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해산해 버립니다. 이로인해 원로원은 폼페이우스를 무시하게 되죠. 왜냐하면 군대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폼페이우스의 요구사항들은 들어주지도 않고 체면만 구기게 했습니다. 폼페이우스가 성공적으로 재편했던 동방의 상황도 다시 엉망이 되어 버리고, 군단병들은 이를갈게 되죠. 원로원이 이런 행태를 보이니 어떻겠습니까?? 힘이 있는 자들이 원로원 저것들이라면서 이를 갈지 않을까요?? 결국 정치적 야심이 큰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기회를 준거나 마찬가지가 되는 거죠.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

2. 1차 삼두정치

원로원도 카이사르의 정치적 야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 총독의 임기가 끝나고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지만 원로원의 견제로 그 결과가 불확실했죠. 그래서 카이사르는 대범한 수를 두는데 바로 폼페이우스와 연합하는 것이었습니다. 서로간에 확실히 이득이 되는거였죠. 카이사르는 이후의 정치활동에서 폼페이우스가 동원할 수 있는 확실한 표와 무력의 뒷받침을 받고, 폼페이우스는 그의 입장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집정관을 원로원에 두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크라수스를 끌어들여 상공업과 중산층의 계급의 지지를 이끌어 냅니다. 또한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에게 정치후원금을 충분히 대어줄 수 있어서 서로에게 윈윈 관계였죠. 카이사르는 집정관에 당성되자 마자 폼페이우스의 군단병들에게 토지를 내어주는 법을 통과 시켜버립니다. 그리고 크라수스의 일도 처리해 버리죠. 근데 여기서 크라수스가 무리수를 둡니다. 파르티아 원정을 떠나는건데 이는 갈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카이사르의 영향이라는 해석이 많습니다. 카르헤 전투에서 로마군은 궤멸당하고 크라수스도 전사하죠. 이제 삼두 정치의 한축이 무너지자 원로원은 폼페이우스를 끌어들이게 됩니다.

갈리아 지역

3. 내전

원로원파가 된 폼페이우스는 사사건건 카이사르와 부딪히게 됩니다. 카이사르의 집정관 임기가 다 되어가자 카이사르의 재출마를 막기 위해서 집정관 선거에 재출마할 때 군대를 해산시키고 민간인 신분으로 로마에 입성해야 한다는 법안을 상정합니다. 누가봐도 그냥 카이사르 제거용 법안이었죠. 카이사르가 받아들일리가 없었습니다. 자시 휘하의 호민관들을 이용해서 계속 거부권을 행사했죠. 혼란이 계속될 무렵 카이사르가 협상안을 제안합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모두 해산하기로 합니다만…. 폼페이우스가 너무 대놓고 반대를 하죠. 이제 원로원은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을 씁니다. 바로 원로원 최종권고였죠. 카이사르 휘하의 호민관의 거부권과 신변 보호권리는 없어져 버렸습니다. 신변 보호권리가 없다는 것은 언제라도 암살당해도 할말이 없다는 것.그럼 이제 하늘의 태양이 누군지 가릴 차례였습니다.  폼페이우스가 극심하게 반대한 이유는 카이사르보다 군사적 업적이 떨어져서 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제 한판 승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에 있난 자신의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루비콘 강을 건너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때 한말이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 죠.

 

Alea iacta est.

(주사위는 던져졌다)

 

4. 진행

원래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 북쪽에서 카이사르를 진압할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갈리아 정복한 카이사르에 대한 원로원의 푸대접을 알고 있는 북부이탈리아의 민심은 싸늘했고, 민심을 잃은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결국 제대로 된 전투한번 못하고 공중분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는 전쟁 준비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카이사르의 군대는 갈리아 지역에서 뼈가 굵은 베테랑 장병들 대충 준비해서는 절대 이길 수 없었죠. 카이사르라는 천재적인 전략가도 있구요. 게다가 최종권고를 발동하기 까지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최종권고를 하고 군대를 모은다는 멍청한 계획을 세워버립니다. 이미 카이사르로 로마의 동맹시들은 다 넘어가 버린 상태였죠. 게다가 이 글을 보는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최종권고라는게 누가봐도 카이사르 곱게 와서 죽어라 였기 때문에 동맹시들이 그 권고에 명분이 있다고 생각하기엔 힘들었죠. 그래서 손쉽게 이탈리아 반도를 점령합니다. 폼페이우스는 그리스 지역에서 군대를 훈련하면서 시기를 보게되죠. 하지만 군사적 행동 경험이 없던 원로원들이 떼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군사 작전권까지 간섭하게 되죠.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군의 규모를 알고 빨리 끝내려고 했지만 보급을 중시하는 폼페이우스는 버티기 전략으로 카이사르군에게 두번의 승리를 거둡니다. 하지만 이 두번의 승리가 독이되고 말았으니….

 

5. 파르살루스 전투와 폼페이우스의 최후

폼페이우스는 고루하게 모루가 버티는 동안 기병으로 측면을 찌른다는 고전적인 전술을 들고 나옵니다. 이 전략을 쓴게 이해는 됩니다. 왜냐하면 기병이 7천이나 될 정도로 폼페이우스는 기병의 전력이 훨씬 좋았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누굽니까 가히 천재라고 불려고 아깝지 않은 인물…. 바로 폼페이우스의 의도를 알아챕니다. 그래서 양방향 공격을 안 받도록 왼쪽부분을 강을 끼고 진을 칩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들어오는 폼페이우스의 기병을 노련하게 잡아내죠. 실전경험이 없는 폼페이우스의 기병은 급격하게 와해되어 버립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폼페이우스군의 측면을 공격해서 결정적 승리를 거둡니다. 그러자 이 전투결과를 듣고 그리스의 모든 로마 속주들이 카이사르 편으로 붙어 버립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까지 도망가서 재기를 꾀하지만 굳이 폼페이우스 자신의 속주인 아프리카로 가지 않고 이집트로 간게 이집트 국왕인 프톨레마이오스12세의 오해를 사게 되어서 이집트에서 암살당합니다. 이집트 왕이 목을 바쳤지만 카이사르는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합니다. 왜냐하면 그걸 핑계로 프톨레 마이오스 13세가 이끄는 이집트 세력을 박살내어 버립니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7세를 세우죠.

파르살루스 전투도

6. 평가

카이사르의 대단한 점이라면 정치인으로 감각도 뛰었났고, 전투에서는 훌륭한 장군의 역할을 잘 수행했습니다. 아마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도 상당한 결단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로마인 이야기에서도 시오노 나나미는 카이사르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죠. 사람이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판단되면 승부를 제대로 거는 것 그것이 범인과 위인을 나누는 경계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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