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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350, General Magnentius deposes Roman Emperor Constans and proclaims himself Emperor.

 

350년 마그넨티우스 장군이 콘스탄스 황제를 살해하고 자신을 황제라 선언하다.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반란자입니다. 콘스탄스 황제를 살해하고, 콘스탄티우스 2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3년만에 제압당합니다. 마그넨티우스 장군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도록 합시다.

 

1. 반란전

마그넨티우스의 금화

 

303년경 사미로브리바에서 브리타니아 속주 출신 아버지와 프랑크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했습니다. 일찍이 군대에 입대한 그는 헤르쿨리아와 요비아 근위대 지휘관으로 승격합니다. 지휘관으로 승격했다는 것은 그가 군인으로써의 능력도 좋았지만 주변 병사들도 잘 챙겨서 많은 이들의 호감을 샀고 이것을 바탕으로 궁정 관리들에게도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시기 로마제국에는 황제 콘스탄스에 대한 불만이 쌓여 갔습니다. 서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콘스탄스는 정통교회 신봉자로 다른 종파와 이교도들을 심하게 탄압해서 인심을 잃었습니다. 거기에다가 황제로서의 능력도 젬병이라 사치를 심하게 부리고, 사냥에 몰두하느라 정무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습니다. 또한 성격도 잔인해서 자기 기분에 따라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죠. 조선의 어떤 왕이 떠오르는 행보긴 하죠.

콘스탄스의 흉상

2. 반란

 

이렇게 반감을 많인 산 황제에게 자기편이 있을 순 없었습니다. 많은 장교와 관리들이 마그넨티우스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결의합니다. 이 시기에 사냥을 떠나서 며칠째 황제의 자리를 비워둔 콘스탄스를 소식을 듣자마자 도망쳤지만 1달정도 후 마그넨티우스가 보낸 암살단에게 살해됩니다. 장군으로서의 능력은 좋았던 모양입니다. 서로마 제국 지역을 빠르게 장악하고 안정화 시키고, 콘스탄스가 앉힌 귀족들 중 몇 명을 처단해 버립니다. 그리고 부족한 정통성을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의 후손인 유스티나와 결혼하여 보충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인정받기를 원해서 콘스탄티우스 2세의 형상이 새겨진 주화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이러한 점을 좋게 볼리가 없었습니다.

서로마와 동로마

 

 

3. 콘스탄티우스 2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 당시 사산 왕조군과 전쟁중이어서 바로 서방으로 군대를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협상을 하게 되지만 협상이 될 수 가 없는 간극이 있었습니다. 콘스탄티우스 2세 입장에서는 만약 마그넨티우스를 인정해 버린다면 이것이 선례가 되어 콘스탄티우스 왕조의 정통성 자체가 무너져 내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이시기 민감한 종교적 문제도 있었습니다. 마그넨티우스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는데, 독실한 아리우스파 신자였던 콘스탄티우스는 이교도가 활개치는 꼴을 보고 있을 순 없었죠. 거기에다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카 율리우스 네포티아누스가 로마를 점거한뒤 황제를 칭했지만 마그넨티우스에게 진압당합니다.

콘스탄티우스 2세

4.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다

 

35031일 일리리아를 지키던 베트라니오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여동생 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의 요청에 따라 카이사르를 칭한뒤 우선 마그넨티우스의 일리리아 진출을 저지합니다. 그리고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사태를 알림과 동시에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해 달라고 했죠. 콘스탄티우스 2세는 사산 왕조와 평화협상을 진행하면서 우선 베트라니오의 요구를 들어주고, 군자금까지 보내면서 군대를 지휘하게끔 합니다. 하지만 베트라니오는 무슨 생각인지 군자금 요구를 계속하게 되고 의도를 의심한 콘스탄티우스 2세는 더 이상 지원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자 베트라니오는 마그넨티우스와 동맹을 맺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제 일전을 준비하죠. 마그넨티우스는 결전을 위해 동방으로 이동하면서 자신의 형제를 카이사르로 삼습니다. 그리고 마그넨티우스와 베트라니오가 동시에 협상안을 제안합니다. 이때는 대게 혈연으로 맺어서 평화협상을 강화하는데, 마그넨티우스의 따른 콘스탄티우스 2세와 결혼시키고, 콘스탄티우스 2세의 누이를 베트라니오와 결혼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콘스탄티우스 2세의 세력와 지위를 유지하겠다고 했죠.

콘스탄티우스 2세는 분열책을 계획합니다. 마그넨티우스 몰래 베트라니오와 협상을 해서 자신과 협력한다면 지금의 황제의 지위를 인정해주고 자신의 여동생을 베트라니오와 결혼하겠다고 제안합니다. 귀얇은 베트라니오는 이 제안을 받아들고 다시 콘스탄티우스 2세와 손을 잡습니다. 하지만 연합연합 구성했을 때 콘스탄티우스 2세는 베트라니오 휘하의 장교들을 따 꼬여내서 베트라니오를 퇴위 시키고, 군대를 다 흡수해 버립니다. 그래도 빨리 항복한 베트라니오는 죽이지 않고 모든 권한을 박탈한 다음 비티니아의 프루시아에서 여생을 보내게 합니다.

 

베트라니오

5. 무르사 전투

이제 마그넨티우스와 콘스탄티우스 2세의 한판 결전이 남았습니다. 351928일 양군이 무르사에서 격돌합니다. 로마 역사에서 무르사 전투는 가장 많은 인명피해가 난 전투중 하나로 95000명이 맞붙어서 5500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대패한 가므넨티우스는 퇴각하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피해를 수습하면서 동시에 다뉴브 강을 건너온 이민족을 상대로 351년 내내 전투를 치릅니다. 그리고 다뉴브 강의 안전을 확보하고 난후 이탈리아로 진격해 들어갑니다. 마그넨티우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군대 아래에서 장군으로 일하게 해달라는 말도 안되는 항복 조건을 내걸었다가 팽 당하고, 이제 갈리아로 퇴각해서 군대를 모아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게 됩니다.

무르사 전투 지역

6. 승리자 콘스탄티우스 2

3537월 콘스탄티우스 2세와 마그넨티우스는 몬스 셀레우코스라는 곳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입니다. 이때도 콘스탄티우스 2세가 대승을 거둡니다. 마그넨티우스는 리옹으로 도망갔으나, 리옹이 포위되자 친척들을 모두 죽이고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동생도 원군을 이끌고 가다 이 소식을 접하고 목을 매어 자살하게 됩니다.

 

7. 이후

반란이 생각보다 컸던 만큼 그리고 종교의 문제가 걸린만큼 확실히 숙청작업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동방으로 돌아가서 서방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에 생긴 동방에서 문제를 일으킨 조카 갈루스도 숙청합니다. 그리고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삼아 게르만족의 침략에 직면한 갈리아를 수습하게 합니다. 하지만 마그넨티우스의 아내인 유스티나는 살아남아 훗날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황후가 됩니다.

 

8. 평가

일단 베트라니오의 배신과 동맹이 핵심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콘스탄티우스 2세에 맞서서 제대로 연합전선을 굳히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큰게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 당시 종교의 문제도 그냥 넘어갈 순 없는데,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지만 다른 말로 하면 종교적인 통일이 되어 있지 않아 정신적인 연합이 되기가 어려웠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리우스파인 콘스탄티누스 2세는 확실히 정신적인 연합이 잘 되어 있었겠죠. 능력없는 황제가 국정을 엉망으로 할 때 언제라도 반란이 일어날 수 있으며 권력자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을 얼마나 잘 사용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시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도 한번 더 느끼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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