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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Calendarium

 

In 379, Emperor Gratian elevates Flavius Theodosius at Sirmium to Augustus, and gives him authority over all the eastern provinces of the Roman empire.

 

379년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시르미움에 있던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승진시키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동방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하다.

 

오늘은 로마의 그라티아누스 황제에 대한 얘기입니다. 서로마 제국을 게르만족을 비롯한 여러 이민족이민부터 잘 지켜낸 왕이었고, 로마제국이 위험에 처할뻔 했던 여러 위기를 슬기롭게 잘 극복한 왕이었습니다. 테오도시우스를 공동황제로 지명한 것도 그 일환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친 기독교 정책을 너무 과감하게 추진하다가 암살당하는 황제입니다. 이 황제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라티우스 1세

 

테오도시우스 1세

1. 황제 즉위 위전

 

그라티아누스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마리나 세베라 황후의 장남으로, 359년 판노니아의 시르미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라티우스는 두번의 결혼을 했지만 자식이 없었습니다. 10살도 되기전에 유니오르 아우구스투스로 지명되어 후계자 교육을 받고 아버지와 전쟁을 누볐습니다. 이때의 역사적 기록이 많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당대 역사가들은 황제의 자질이 탁월하다고 찬사를 보냅니다. 문인들과 자주 교류하고, 병사들에게 잘 대하고 전술적 능력도 뛰어났습니다. 게다가 활과 창등을 잘 다루었습니다. 또한 백성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었죠. 이런 모습을 보였다고 되어 있으니 기본적으로 역사가들이 찬사를 보낸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판노니아 속주

 

발렌티니아누스 1세

2. 서방 황제로 즉위하다

 

37511, 발레티니아누스 1세가 급사합니다. 이때 아버지 곁에 있던 그라티우스는 곧바로 황제로 추대됩니다. 근데 다른 장군들이 그라티아누스의 동생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황제로 추대합니다. 이렇게 되면 황제가 2명이 추대된거라 어쩔수 없이 피를 흘릴수 밖에 없었겠죠. 하지만 이때 현명하게 잘 마무리를 합니다. 일단 이탈리아, 일리리쿰, 북아프리카를 메디올라눔에 자리잡은 발렌티이나누스2세의 영역으로 하는데 동의하고 자신은 갈리나, 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16세 밖에 안되었는데 발렌티니아누스2세가 더 어리다는 이유로 그가 맡은 쪽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죠. 즉 영역은 인정해 두되, 그곳에서의 실제 통치권은 자기가 쥐는 똑똑한 대처를 해서 피를 흘리는 일을 막았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삼촌인 발렌스에게도 인정을 받게 됩니다.

 

3. 위기

그라티아누스는 라인강을 넘어오던 게르만족과 전쟁을 벌여 수차례 승전을 거둡니다. 하지만 378년 고트족의 반란으로 곤경에 빠진 동로마 제국의 구원요청이 들어오자 선봉대를 보낸후 자신이 본대를 이끌고 가기로 합니다. 근데 이때 라인 강 유역에 거주하던 알레만니족이 침공하게 되고, 구원을 하러 가지 않고 우선 알레만니족의 반란을 제압하게 됩니다. 하지만 본대가 가질 않았으니 동로마 제국의 구원요청에 제때 가지 못하게 되고 이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스의 전사를 초래하게 됩니다. 다뉴브강 일대가 철저하게 파괴되게 되는데 자신이 군대를 내세우자니 갈리아쪽에 또 침공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가 전해집니다. 즉 그라티아누스가 자신의 영지를 떠나지 못할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죠. 이때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4. 테오도시우스 1세 즉위

 

379119일 그라티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 장군을 자신의 동료황제로 지명합니다. 테오도시우스 장군의 아버지가 반역죄로 처벌당했기 때문에, 의외의 결정처럼 보였지만, 그라티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 장군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그의 아버지를 복권시킨 다음에 동료황제로 지명하고 동방을 맡기게 됩니다. 이 결정은 엄청난 효과를 일으키게 되는데, 테오도시우스는 고트족과 일전을 벌여 드디어 저지에 성공하고 381년 고트족의 왕 아타나리크와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트라키아 속주에 고트족을 대거 이주시킵니다. 동방의 걱정을 던 그라티아누스는 라인강 전선의 경비를 처저하게 강화하고 적들을 완전히 격파합니다. 재빠른 결정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셈이죠 동방의 황제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 이런 복잡한거 없이 재빨리 테오도시우스 1세를 지명함으로써 로마 제국의 안정을 꾀하게 됩니다.

 

5. 종교문제

이제 서쪽과 동쪽 국경이 안정되었으니 종교문제에 관심을 돌립니다. 하지만 이를 굉장히 극단적으로 추진합니다. 미신적 관습을 폐지하고, 마녀 및 마술사들을 처형한다는 칙령을 반포하고, 아리우스파를 비롯한 이단 종파들을 금지한다는 칙령도 반포했습니다. 거기에 로마 다신교 숭배를 억제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책을 취합니다. 스스로 로마의 신들을 모시던 최고신관,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책에서 물러납니다. 원로원의 반발을 무릅쓰고 원로원에 설치되었던 승리의 제단을 다시 폐쇄하고 베스타 신전의 해체를 시작합니다. 이정도도 충분한 반발을 일으킬만 한데 계속 종교문제는 계속됩니다. 이교도 사제들의 재산 상속을 금지하고, 모든 특권을 박탈해 버립니다. 이게 순식간에 완전 뒤엎듯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로마 다신교를 신봉했던 사람들 뿐 아니라 일부 기독교 관리들도 우려를 표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칙령까지 반포해버리자, 결국 다신교신봉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6. 최후

383년 다신교 신봉자들이 많은 브리타니아 주둔 로마군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황제로 옹립하고 갈리아로 침입합니다. 그라티우스는 반란군과 맞붙었는데 문제는 기병대도 배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300여명의 기병대만 이끌고 리옹으로 피신하는데 리옹의 총독이 배신해 버려서 383825일 리옹에서 암살당합니다. 24세밖에 되지 않을 때였죠.

마그누스 막시무스

7. 평가

여러 역사서들에게서 황제로서의 자질에 대한 평가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급진적인 정책은 늘 화를 부르는 법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기득권이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득권자들이 기득권을 내려놓게 하는 방법은 절대 급진적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프랑스대혁명 같은 완전 판을 뒤엎고 상대방이 죽어서 판 자체가 바뀌는 일이 생겨야 하는데, 요즘 같은 문명화된 사회에서 그런일은 일어나기가 어렵죠. 특히나 종교적인 문제는 그 당시에는 밥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였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아직 충분히 어린 나이이고, 건강을 잘 유지한다면 저런 정책들은 하나씩 해도 될 일이었습니다. 여론전도 같이 하고, 좀더 그리스도교인이 늘어날 때 까지 기다려도 되구요. 현 정치권들도 전 느끼는 바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전 급진적인 변화는 따라잡기가 어려워서 좋아하진 않습니다.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를 얻고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할때 그리고 그 타이밍을 정확히 보고 좀 미래를 보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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