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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763, The Battle of Bakhamra between Alids and Abbasids near Kufa ends in a decisive Abbasid victory.

 

763년 알리드와 아바스 왕조사이에 쿠파에서 벌어진 바캄라 전투가 아바스 왕조에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주다

 

흔치 않은 중동의 역사 입니다. 우마이야조 이후 생긴 아바스 왕조는 아랍의 황금기를 이끈 왕조였습니다. 이런 아바스 왕조의 초창기에 일어난 반란으로 아바스 왕조의 탄생에 큰 기여를 한 시아파의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고 아바스 왕조의 세습에 안정을 기한 사건입니다. 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알 만수르 시대때 제조된 동

1. 배경

1) 정통 칼리파 시대

일단 이슬람 교의 탄생과 성장배경에 대해 조금은 언급하고 지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사후, 그의 후계자들이 다스리는 정통 칼리파 시대가 열립니다. 30여년 동안 정통 칼리파 시대는 제 4대 칼리파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시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무아위야 1세와 맞서던 중 이슬람의 근본세력중 하나인 카와리즈파 암살자에게 살해당하고, 뒤를 이흔 하산 이븐 알리가 무아위야에게 항복하면서 종결되었습니다. 당연히 전쟁에 승리한 무아위야는 스스로 칼리파에 올라 우마이야 왕조를 세웠고, 우마이야 왕조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일대까지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면서 이슬람의 시대를 열어나갑니다.

대천사 가브리엘에게 계시를 받는 무하마

2) 우마이야왕조

하지만 우마이야 왕조는 한계점이 명확하게 존재했습니다. 바로 아랍인들만이 명확한 지배계급이 될 수 있었고, 피정복인들은 마왈리 – 2등 시민 으로 분류되어 지즈야 이슬람 국가에서 비 이슬람인들이 내던 종교세와 재산세 를 그대로 내야했습니다. 원래 가지고 있던 종교를 버리고 이슬람 교로 개종해도 그러한 세금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또한 도시 중심지에 거주할 수 없었고, 아랍인과 결혼하는건 불가능하진 않았지만 하늘의 별을 딸 정도로 난이도가 매우 높았으며, 아랍 양식의 복장을 입지도 못했습니다. 여기에다가 통합에 신경을 써야할 우마이야조는 시아파와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을 탄압하여서 그들의 불만을 쌓여져 갔습니다. 그들은 우마이야조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무함마드의 정통 칼리파들의 후손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진정한 후손으로 여겼습니다. 거기에 무야위아에게 항복했던 하산 이븐 알리를 죽여버린 카르발라 참극이 벌어졌으니시아파가 우마이야 왕조를 좋게 볼리가 없었죠. 참고로 시아파는 1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니파를 비난하고 아슈라의 날인 되면 후세인 이븐 알리가 겪었을 고통을 조금이라도 나누기 위해 자신을 채찍으로 때리거나 칼집을 내어 얼굴을 자해하는 행사를 벌일 정도입니다.

여튼 결국 아랍인 우월 정책을 펴다보니 우마이야 왕조내 무슬림 비율이 굉장히 소수였습니다. 그리고 우마이야 왕조 칼리파들이 선교에 별로 열성적이지 않고 향락에 탐닉한다고 반감을 품고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때 시리아 군대를 제국 전역으로 보내 진압하게 합니다. 하지만 시리아 군이 사방으로 분산되면서 각개격파될 위험이 커지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바로 아부 알 아바스가 이끄는 아바스 가문이 등장하게 됩니다.

아부 알 아바

3) 아바스 가문의 등장

아바스는 우마이야조의 문제점을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교, 민족을 초월한 평등함을 내세워 굉장히 많은 이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게 됩니다. 그리고 수업이 실패한 반란을 거울삼아, 처음부터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고, 체계적인 선전 센터를 두고 별도로 담당자를 두게 됩니다. 우마이야 왕조는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호라산과 이카르의 대다수 지역을 정복할 때 까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747년 라마단 기간을 활용해서 호라산을 정복하였고, 749년봄 까지 이란과 이라크를 획득하게 됩니다. 이때 국기는 우마이야 왕조의 백기에 대항해서 흑기를 군기로 썼습니다. 그 당시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였던 마르완 2세는 콥트교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집중하다가 아바스의 반란 소식을 듣고 급하게 이라크로 향했지만 티그리스강 북부지류인 대 자브 강에서 아부 무슬림이 이끄는 반란군과 우마이야 왕조군이 맞붙었고, 우마이야 왕조군이 참패해 버립니다.

 

4) 엄청난 숙청 과정

새로운 왕조가 건설되었으니 기존 왕조의 사람들의 운명은 빤했습니다. 아부 알 아바스는 다마스쿠스에 입성한뒤 우마이야 왕조를 따랐던 사람들을 모조리 처형해 버립니다. 도망간 마르완 2세도 붙잡아서 처형해 버립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우마이야 왕족들에게 연회에 참석하게 한 다음에 전원 학살해 버립니다. 마지막 우마이야 잔존 세력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축출해 내는데 성공합니다. 우마이야 왕조의 씨를 말리기 위해 항복한 적도 온갖 트집을 잡아 처형해 버리죠. 우마이야 왕조의 사람은 미리 도망가 살아남은 제10대 칼리파 히샴의 손자 아브드 알 라흐만 1세로 멀리멀리 도망가서 후우마이야 왕조를 건설하게 됩니다.

 

5) 고선지

참고로 이때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군대가 751년 트란스옥시아나를 침공합니다. 이때 호라산 주둔 무슬림 군이 출진하여 탈라스 전투에서 당군을 격파합니다. 이때 포로가 된 중국인들 중 종이를 제조하는 기술을 갖춘 사람이 있었고, 이때 이슬람 세계는 제지술을 습득합니다.

 

5) 아부 알 아바스 붕어

754610, 아부 알 아바스가 붕어합니다. 아바스는 이복형 자파르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형 이브라힘의 아들 이사를 그의 후계자로 삼게 합니다. 하지만 이때 시아파쪽이 새 칼리파가 자신들이 선출한 이맘이 되어야 한다며 실망감을 드러냅니다. 이때 자파르 알 만수르 는 시아파가 혁명의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지만 아바스 가문의 세습 집권에 방해가 된다고 여기고 숙청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우선은 아바스 왕조 건국에 큰 기여를 했지만 잠재적인 위험인물로 여기던 아부 무슬림을 살해하고, 이에 반발한 추종자들을 모조리 살해해 버립니다. 그리고 시아파를 권력에서 배제하고 아바스 왕족과 비아랍 무슬림들을 요직에 대거 기용했습니다.

 

2. 본격적인 탄압

이제 본격적으로 알 만수르의 탄압이 시아파에 가해졌습니다. 이 당시 시아파의 중심인물은 무하마드 이븐 압달라와 이브라힘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알 만수르에게 충성서역을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아파를 어떻게든 처단 할려고 했던 압달라부터 붙잡아 체포하고 그의 친족까지도 체포해 버립니다. 이제 시아파들 내부에서도 알 만수르에 대한 박해에 대해 먼가 액션을 취해야 하지 않냐는 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3. 메디나에서의 반란

이 두 형제는 바스라와 메디나에서 동시에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무릇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냥 성급하게 반란을 일으키게 되죠. 형인 압달라는 메디나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초기에는 이전 세력들에게서 지원을 받았으나 우마이야조를 지지하는 세력의 지지도 크지 않았고 메디나가 상징성이 있는 도시이기는 하나 군대를 이끌고 요새화 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군대가 제대로 조직되지도 못했고 탈영병들이 많아졌습니다. 762126일 추종자 300여명과 함께 전멸합니다. 당연히 우두머리는 압달라의 머리가 온전할리는 없었겠죠.

메디나

4. 이브라힘의 바스라 봉기

압달라의 반란에 제대로 호응도 할 수 없었던 이브라힘은 형의 지위도 넘겨받습니다. 하지만 조직적으로 일사분란한 행동을 하는 군대에서 제대로 된 통일된 움직임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저 모으다보니 서로 정치적인 목표도 다르고 반란의 목표가 다른 집단들이 모여졌고, 이에대한 통일된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이들을 지지한다고 한 세력들도 말로만 하거나, 아니면 조금의 금전적인 기부로만 한정하면서 실제 반란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없었죠. 이렇게 갈팡질팡 할 동안 알 만수르는 시리아와 이란에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이브라힘의 군대에서도 탈영병이 생기기 시작해서 이사 이븐 무스가 이끄는 아바스 군대와 대결할대에는 15000명으로 쪼그라 들었다고 합니다. 121일 바캄라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전투는 아바스 군대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214일 부상으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반란을 종식되게 되죠

바스

5. 여파

당연히 알 만수르에게는 곱게 보일리 없었겠죠. 자신의 세습도 반대한데다가 반란이라니 그래서 대규모로 보복을 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알 만수르가 더 오래 살았다면 시아파가 괴멸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진 않고 서로 반목하거나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되면서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시절의 바그다드

6. 평가

중동의 역사이고 게다가 크게 중요하게 취급받지 않은 역사이다 보니 영문 위키디피아에도 자료가 없었습니다. 기술하신 분들도 없었구요. 시아파를 숙청하는 기간중에 일어난 일이라는 점에서 조금 알아보고 정리했습니다.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무하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할 때 이렇게까지 폐쇄적인 이미지로 될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기존의 여러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왕권이 흔들리면 통일된 대응을 하지 못해서 위험에 처하는 경우가 여러 있었던 만큼 정권을 잡은 쪽에서 정권을 잡지 못한 쪽을 적극적으로 탄압하고 숙청하는 사례는 고대사를 보면 어디에서나 있는데 이 역사도 그러한 역사들의 하나의 예시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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