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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eror Decius begins a widespread persecution of Christians in Rome. Pope Fabian is martyred.

 

황제 데키우스가 로마제국 전역에 걸쳐서 기독교인들의 박해를 시작하다. 파비아노 교황이 순교되었다.

 

서양의 고대의 역사는 역시 로마사가 메인인 것 같습니다. 제가 보는 모든 부분이 로마사가 많이 나오네요 오늘은 로마 제국 30대 황제인 데키우스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데키우스는 이 사람을 평가하는 역사가가 누구냐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데 정통적인 라틴계열 학자들에게서는 좋은 평가를, 하지만 당대 크리스트교 사람들에게는 지긋지긋한 짐승이라고 비난받고 있습니다. 이 데키우스 황제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도록 합시다.

데키우스 황

1. 황제 즉위 전

황제가 되기 전 데키우스의 생애에 대해서는 역사가들마다 추측이 다양합니다. 지금 대다수의 역사가들이 추측하는 것은 속주 태생의 기사 계급 출신의 상류층인 원로원 의원이자 장군인 것으로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 기록에 따르면 232년에 첫 집정관을 맞았고 235년부터 238년까지 군사적 자질을 요구하거나 원로원 귀족들이 선호하는 모이시아 총독, 히스파니아 총독등을 맡았습니다.

여러 기록등을 조합해 본다면, 데키우스는 젊은 시절부터 군사, 행정 쪽에서도 두각을 나타냈고, 인품도 좋았던데다가 교양도 뒤떨어지지 않은 훌륭한 전술가이자 장군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원로원과의 관계는 돈독했고 그 당시 황제였던 필리푸스 아리부스와의 관계도 좋은 편이었습니다.

 

2. 황제 즉위

245년 데키우스는 필리푸스 황제의 명령을 받고 다뉴브 방면군 사령관에 부임합니다. 그리고 248년 모이시아와 판노니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됩니다. 이 반란을 진압하고 난 이후, 그가 이끄는 군대그 그를 황제로 추대합니다. 데키우스는 보라색 망토를 걸치고 꽤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숙고 끝에 받아들이고 로마로 진격합니다. 반란엔 명분이 필요하죠 이때 데키우스는 무너져 내려가는 국가의 재건과 부활을 기치로 내걸고 249년 로마로 진군합니다.

2499(혹은 10) 필리푸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붙은 데키우스는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지방의 베로에아에서 정면으로 맞붙어 승리를 거둡니다. 이때 필리푸스는 부하들의 배신에 절망에 빠져 자살해 버립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비정하게도 근위대는 필리푸스의 아들을 근위대 병영에서 살해해 버리고 원로원은 데키우스를 황제로 인정해 버립니다.

이후 데키우스는 권력을 다지고, 황제로서 해야할 일을 바로 하게 됩니다. 원로원이 선사한 트라야누스라는 칭호를 가문의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로마 재건을 위해 공공건축물들을 보수하고 신축 건축물도 건설합니다. 그리고 감찰관을 부활시키기로 합니다. 일종의 정치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원로원에 감찰관의 선출을 맡겼지만 선출된 발레리아누스는 신하의 신분으로 그런 무거운 책무를 받을 수 없다고 하며 고사하죠.

 

3. 다신교 부흥정책 = 기독교 박해정책

데키우스는 로마 다신교 부흥에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로마 제국이 쇠약해지는 이유가 사회 기강이 문란해지고, 종교적 신념이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종교적 열기를 되살리고, 이를 바탕으로 제국의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신전을 새롭게 건축하과 복원하는 사업이 이탈리아 전역에 걸쳐서 이루어졌죠. 이 명령에 따라서 아퀼레이아 주민들은 넵투누스의 동상을 복원하고 아프로디시아스 주민들은 황제로부터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희생제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우상숭배에 따를리가 없었고, 기다렸다는듯이 데키우스는 대대적으로 탄압합니다. 하지만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기 보다는 희생제를 드리기를 거부한 기독교도 개인의 행위를 문제시 삼았습니다. 기독교 전체를 탄압했다면 교회를 다 파괴해 버리거나 성경을 불태우거나 했을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데키우스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신들을 부정하는 무신론자이며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범죄자라고 여겼습니다. 이때 교황 파비아노, 안티오키아의 주교 바빌리 등 유명 인사가 순교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숨어지냈고, 많은 교인들이 배교했습니다. 아마 데키우스가 오래 살아있었으면 이런 박해는 끝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성 파비아노

 

 

4. 전사

전쟁 흐름

 

205, 고트족이 모이시아와 트라키아를 침공합니다. 이 소식을 접한 데키우스는 급히 트라키아로 진군해 고트족이 접근합니다. 이때 고트족은 하에무스 산맥을 물러나서 데키우스는 추격하지만 도망치던 고트족이 갑자기 기습을 가합니다. 결국 이 기습에 격파된 로마군이 군대를 수습할 동안 필리포폴리스의 수비군 사령관은 고트족에 항복하고, 크니바 왕과 동맹을 맺고 데키우스에 대항하게 됩니다.

하지만 전의와 군세를 회복한 데키우스는 일단 고트족과 합류하려던 카르피족과 게르만족의 행군을 차단하고, 산꼭대기의 통로를 막아버리고, 국경요새를 강화합니다. 그래서 고트족의 퇴로를 완벽하게 막아버리죠. 고트족은 위험에 빠집니다.

일단 고트족 왕 크니바는 전리품과 포로들을 모두 내주는 조건으로 협상을 시도하지만 데키우스는 콧방귀만뀌죠. 이미 전세를 기울어졌다고 판단한 겁니다. 이제 고트족은 배수진을 치게 됩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한판 승부를 보기로 하고 2516월 모이시아의 아브리투스에서 로마군과 격돌하게 됩니다. 이를 아브리투스전투라고 합니다.

고트족은 3개 대열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제3열의 전면은 습지대를 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첫번째 교전에서 데키우스의 아들이 전사합니다. 하지만 전투를 이끌어야 했던 데키우스는

 

한 병사의 죽음은 공화국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는 말을 남기고 군대를 계속 지휘합니다. 그리고 고트군의 제1열과 제2열을 섬멸하죠. 하지만 머가 그리 급했는지 제3열앞에 있던 늪지대를 보지 못하고 빠져버렸으며, 그 상태로 괴멸됩니다. 이때 데키우스도 전사했고, 시신은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루다비시 대석

5. 평가

데키우스의 평가는 기독교 박해를 제외한다면 굉장히 좋은편입니다. 데키우스는 현재까지도 뛰어난 발칸 출신의 로마 황제의 1번 타자이자 그 시작으로 불립니다. 나중에 즉위하게 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아누스 1,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대선배이자 직속선배라는 평가입니다.

그러나 국가에서 조직적으로 기독교도를 바가해했기 때문에 기독교 공인 이후의 평가는 좋지 못합니다. “지긋지긋한 짐승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죠

군인 황제 시대에 있어서 국가행정, 군사 측면에서는 평가가 좋지만 기독교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로 여전히 논쟁거리가 되는 황제 입니다.

 

데키우스 황제의 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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