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 오늘의 Calendarium

 

1545

Council of Trent Begins

 

해석

1545년 트렌트 혹은 트리엔트 공희의가 시작되었다.

 

유럽에 있어서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을 때 카톨릭 내부에서 이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기 위한 제 19차 회의를 말합니다. 시작은 15451213일에 시작되었으나 1563년까지 18년간 이어진 종교회의 입니다. 개신교의 개혁에 맞서서 카톨릭의 교리와 체계를 재정비한 회의인데 생각보다 문화적으로 영향을 많이 미쳤습니다.

 

2. 배경

원래는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으로 인한 교회의 분열을 막기위해 소집되었지만 개신교도들은 거의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카톨릭도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당시 교황은 각 나라의 황제 이상의 존재였기 때문에 자신이 쥐고 있는 권력을 놓으려 하진 않았죠. 그래서 그 당시 교황인 클레멘스7세는 공회의에 소극적이었습니다. 하지만 1534년에 새로 교황이 된 바오로 3세가 교회개혁추기경회의를 창설하여 개신교의 요구이상으로 카톨릭의 내부 개혁을 위한 기구를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공회의 소집요구에 동의합니다.

바오로 3세

3. 진행

18년동안이나 진행된 회의긴 하지만 18년 내내 회의를 한 것은 아닙니다. 100년 전쟁이 100년 동안 내내 전쟁을 한게 아닌 것 처럼요. 교황이 바뀌면서 그리고 논쟁이 격해지면서 중간중간 회의가 휴식기를 가졌고 총 3번에 걸쳐서 회의가 진행되었습니다. 결국 공회의에서 종교개혁가들이 지적한 여러문제들에 대한 카톨릭의 교리를 정의하고 교회의 규율과 제도 개혁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당시 교황인 바오4세는 공회의에서 결정한 내용을 승인하고 트리엔트 신앙고백이라는 교리 요약집을 만들어서 배포하게 됩니다.

공회의의 묘

4. 토론

카톨릭이나 개신교에 관심이 없으신 분들은 필요 없으신 내용이겠지만 요약을 하면 개신교도측은 성서를 유일 권위로 인정하고, 성서 해석의 자유를 보장하여 교회의 권위를 부정했습니다. 오로지 믿음으로만 면죄가 가능하고,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가지 성사만 받아들이자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는 카톨릭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죠. 당연히 자기가 가진 기득권을 다 내려놓으라는데 찬성할 사람이 없죠. 독일 문학의 시작이라는 루터의 해석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고 라틴어 성서인 불가타를 공식적인 성서로 인정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성서뿐 아니라 성전도 신앙의 원천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교회의 권위를 어느정도 지키게 되었죠.

또한 믿기만 하면 면죄해 준다는 면죄설을 배격하고 구원을 얻으려면 신앙뿐 아니라 선행이 필수적임을 강조하게 됩니다. 또한 일반 신도들과 성직자를 엄격히 구분하고 성직자의 교육과 성직자의 임명과 관리의 체계화를 공언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개나소나 성직자라고 우길 수 없고 엄격한 과정을 거쳐서 선발되어 신학교에서 반드시 교육을 거쳐야 하고 그렇게 배출한 사제들은 각각의 구교관구와 교구안에 거주해야함을 명시합니다.

어떻게 보면 현재 국내 천주교 사제들의 행동에 기본을 닦은 회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결과

1)  종교적인 결과

 

이 공회의를 역사적으로 높게 인정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그 당시 개신교도들의 제가한 문제에 대해서 카톨릭 자세의 신앙과 교리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정리하게 된 점이죠. 또한 이 회의이호 로욜라가 결성한 예수회에 의해 더 확실한 개혁을 진행함으로써 카톨릭 신앙을 좀더 공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의 분열을 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카톨릭과 개신교도들의 믿음이 확연히 구분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카톨릭이라는 이름하에 완전히 통일되어 있는 카톨릭적 보편성 자체가 없어진 회의로 평가 받습니다.

트리엔트 공회의를 묘사한 그림

2) 문화적인 결과

아마 여러분들은 우상숭배라는 말을 들어보신적이 있으실 겁니다. 왜냐면 트리엔트 공회의의 결과로 성모숭배와 비적(sacrament, 신의 은총을 인간에게 수여하는 것, 예를들어 세례, 고해, 성찬, 종부, 서품,결혼, 견진 등을 다 비적이라 합니다.) 신앙을 확인하게 되었죠. 이 회의 교령으로 인해 신교의 성상파기 혹은 성상 부정에 대해 교회의 성상과 성유물 보호에 대한 입장을 확실히 밝히게 되는데 이 내용으로 인해 바로크미술의 근간이 세워지게 됩니다.

 바로크 미술의 길을 개척하였다. 도상(여기서 도상이란 종교나 신화적 주제를 표현한 미술 작품에 나타난 인물 혹은 형상을 의미합니다. 에 관해 엄격한 규정을 정한 것은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게 되는데 교령은 성상과 성유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그리스도, 성모, 성인 등의 성상이 성당내에 안치되어 예배를 받을 것이며, 사교와 신도에게 회화나 기타의 것으로 표현된 구제의 비적을 통해 신앙의 진리를 잊지 못하도록 배려하고 신은 육안으로 보든가 색과 모양으로 표현할 수 없음을 가르쳐야 할 것이며, 조각상에 과도한 장식과 채색을 하는 것 등 공상과 이어지는 것은 피하며 세속적 또는 예배대상이 아닌 것은 성당 안에 두어서는 안된다

 

로크 미술에서 순교, 신성인의 신화, 교회의 승리 등이 주제가 모두 이 종교회의가 기반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 그레고리우스 1세가 문맹의 성서라고 일컬어 질 정도로 좋은 선교의 수단이기도 했죠. 충실한 도상에 대한 표현은 트리엔트 양식을 거쳐 칼리치와 카라바조와 같은 리얼리즘의 탄생이 기여합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 왜 옷을 입고 있을까 공회의의 영향이다.

 

 

5. 마무리

이번에는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개신교의 요구에 맞선 카톨릭의 대응을 확실하게 정리해돈 트리엔트 공회의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영문 위키디피아에서는 이 문서가 너무 방대해서 읽어보다가 정리가 안되어서 다른 요약본을 참고했습니다. 즐겁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