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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Calendarium

 

In Ad 41 After a night of negotiation, Claudius is accepted as Roman Emperor by the Senate.

 

서기 41년 한밤의 협상을 통해 클라우디우스가 원로원에 의해 로마의 황제로 추대되다.

 

저번에 다루었던 칼리굴라의 암살 이후의 이야기 입니다. 칼리굴라의 암살이후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로 등극하기 까지의 내용입니다. 클라우디우스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고대 로마 제국의 제 4대 황제이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4번째 황제입니다. 게다가 당대 역사가이기도 합니다. 클라우디우스 1세로 등극하는 클라우디우스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고 서기 41125일에 무슨일이 생겼는지 알아보도록 합시다.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의 흉상

 

1. 클라우디우스 1

1) 생애

- 즉위전

클라우디우스 1세는 기원전 1081일 아버지 대 드루수스의 임지인 루그두놈(현재의 프랑스 리옹) 에서 5남매 중 막내아이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당시의 이름은 데키무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였고, 한번 개명해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를 사용하다가 아버지가 원로원에게 게르마니쿠스의 호칭을 허락받으면서 하나가 더 추가되어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로 개명을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우구스투스의 정식 법적 상속인이자 양자로 율리우스 가문에 입양되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본명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로 바꾸게 됩니다. 아우구스투스와 비테리우스 황제 통치하에서는 육체적 장애 뇌성마비로 보는 학자로 있고 소아마비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 로 공적 생활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율리우스 씨족이 아니었으므로 칼리굴라에게 제위가 넘어가고 클라우디우스는 역사와 저술에 집중하면서 재야에서 은거합니다. 이때 에트루리아의 역사, 카르타고의 역사등을 저술합니다. 41년 칼리굴라의 암살이후 황제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즉위이후

황제로 즉위한 이후에는 칼리굴라 암살 직후 정국을 신속하게 안정화시켰고,  달마티아 반란을 진압하고 북아프리카 마우레타니아 문제도 무난하게 해결합니다. 그리고 선대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가 확립한 체제들을 보강하고 정비했습니다. 이는 클라우디우스이후 즉위한 네로 황제가 로마를 거의 엉망으로 만들고 로마가 내전에 접어들었지만 빠르게 안정화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습니다. 또한 칼리굴라 암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급진적인 권력 쟁취가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처럼 점진적으로 하지만 확실하게 황제의 권한을 키워 나갔습니다. 또한 오스티아 인공항구도 건설하게 되죠. 오스티아 인공항구의 건설은 클라우디우스의 공공개혁의 일환이었습니다. 모래톱에 막혀있어 로마 항구로서의 역할을 못하던 오스티아를 제국 수도의 외항으로 만들어 내 곡물 운송과 가격 조절 문제를 일순간에 해결했습니다. 실제로 220km나 이동해야할 곡물과 무역품들이 매우 저렴한 비용에 로마시민에 제공되었습니다. 또한 이로인해 손해를 입은 선주들은 대상으로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등의 보상책도 같이 실시 했습니다.

하지만 지도자로서는 지나치게 온화하고 그리고 부족한 정치경험 탓에 당대에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러한 우유부단함은 후계구도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해 아내들에게 휘둘려서 결국은 폭군 하면 떠오르는 황제인 네로의 등극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게 되죠.

오스티아 항구

-말년

클라우디우스1세는 총 4번의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나 아내들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를 권력쟁취의 도구로만 사용합니다. 특히 세 번째 아내 발레리아 메살리나와 네번째 아내 소 아그리피나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살리나의 사이서 브리타니쿠스라는 아들을 봤으나 결국 소 아그리피나가 양자로 받아들인 네로에게 결국 암살당하죠. 좋은 얘기는 아니지만 한때 유행한 단어인 퐁퐁남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이 마지막 아내가 자신의 아들인 네로를 옹립하기 위해 여러 번 시도해서 클라우디우스를 독살합니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의 유언장 및 이전에 낳은 아들인 브리타니쿠스도 무시해 버리고 네로를 옹립해 버리죠.

멧살리나와 브리타니쿠스

 

아그리피나와 네로

 

2. 서기 41125

서기 41124일에 근위대가 조카 칼리굴라를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당시 클라우디우스도 암살 현장인 로마 팔라티누스 언덕의 궁전이 있었는데, 근위대가 칼리굴라의 지시라고 한 까닭에 헤르마이움이라는 방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카시우스 카이레아의 명령에 따라 클라우디우스는 영문도 모르고 황궁에 들어갔고, 이때 소란이 벌어지게 됩니다. 황궁안에서 가장 어둡고 안전한 곳에 피신합니다. 칼리굴라와 카이소니아, 율리아 드루실라가 모두 살해된 뒤 카이레아의 지시로 클라우디우스까지도 살해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카이레아는 아우구스투스의 혈족을 완전히 없앨 생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카이레아 휘하가 아닌 또 다른 근위대장 클레멘스의 부하들에게 발견되고 근위대장 클레멘스는 칼리굴라의 죽음에 분개하여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남자혈육 클라우디우스를 찾자마자 정중히 예의를 갖추고 로마 근교의 근위대 병영으로 클라우디우스를 모셔가 보호합니다. 야사의 기록은 좀 다르긴 합니다만 클라우디우스가 정통 율리우스 가문의 적자도 아니고 선천적인 장애가 있었으며 너무나 지나친 꼼꼼함으로 인기가 별로 없어서 생겨난 얘기가 아닌가 합니다. 여튼 이러한위기 상황에서 근위대 병영으로 이동한 클라우디우스는 차분하고 냉정하게 행동하여 근위대 대장을 비롯한 근위대 병사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합니다. 병사들이 죽은 가이우스(칼리굴라)를 위한 복수를 외치면서 자신들이 죽더라도 무조건 카이사르 가문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모두 충성을 맹세했다고 합니다. 이제 확실히 구워삶을려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현금이  최고입니다. 병사 한명당 15천 세스테르티우스의 보너스까지 하사합니다. 그리고 근위대 병영에서 황제로 추대되죠. 이제 그럼?? 해야할 일은 칼리굴라 암살을 주도한 이들을 확실하게 처단하는 거겠죠. 그래서 카이레아와 율리우스 루푸스등 황제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빠르게 처형해 버리죠. 그럼 칼리굴라 암살과 함께 공화정을 되돌릴려고 했던 원로원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원로원이 유피테르 신전에 모여 공화적 회귀 여론을 수렵하고 수도 경비대를 이용해 로마를 점령할려 했지만 이미 클라우디우스는 빠른시간내에 칼리굴라 암살 이후의 혼돈을 빠르게 안정시키고 확실한 지지세력도 만듬셈이 되었습니다. 원로원이 황복을 권하는 문서를 보냈겠지만 콧방귀도 뀌지않고 무시해 버립니다. 오히려 클라우디우스의 근위대가 더 단결하는 계기만 되었을 뿐입니다. 결국 원로원은 클라우디우스를 황제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등극의 묘사

 

선천적 장애를 가진 클라우디우스를 얕잡아 보다가 크게 한방 먹은 원로원은 그저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추가적으로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을 처형하는 한편 황제 가문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을 하게 됩니다. 친황제 여론을 만들고 공화정 복귀 여론을 잠식시켜 나갑니다. 하지만 여전히 공화정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원로원 의원들이 있어서 30일간 원로원 출입도 하지않고 철저한 몸수색후 사람을 만나는등 주의에 주의를 기울인 클라우디우스는 몇몇의 가담자를 확실하게 척살한 다음에야 칼리굴라 암살 이후의 복수가 끝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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