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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41 – Roman Emperor Caligula, known for his eccentricity and sadistic despotism, is assassinated by his disgruntled Praetorian Guards. The Guard then proclaims Caligula’s uncle Claudius as Emperor.

 

서기 41년 기행과 가혹한 폭정으로 이름이 알려진 로마의 황제 칼리굴라가 불만이 가득찬 근위병에게 암살되었다. 그리고 그 근위병은 칼리굴라의 삼촌인 클라우디우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요즘 들어서 고대기록이 발견되면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칼리굴라의 이야기 입니다. 네로만큼은 아니지만 기행을 벌였고 많은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인 전력 때문에 칼리굴라의 여러면모가 단순히 그 잔혹성과 이상함에 방점을 찍힌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근대에 여러 고대기록들이 발굴되면서 칼리굴라에 대한 평가가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요즘 역사학자들은 권력강화를 너무 속도를 내면서 하다가 반발을 불러일으켜서 암살된 황제 정도의 평가를 합니다. 그럼 칼리굴라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도록 합시다.

칼리굴라의 흉상

1. 황제가 되기전

아버지 게르마니쿠스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

 

1) 탄생

서기 12831일 안티움에서 아버지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와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납니다. 어릴때의 이름은 가이우스로 어릴적부터 게르마니아 지역의 사령관으로 근무한 아버지를 따라 게르만족과의 전선지대내 병영에서 성장합니다. 이때 병사들과 똑 같은 복장을 하고 병사들과 같이 먹고자고 했었습니다. 이때 가이우스가 걸음마르 때면서 칼리가를 신고 있는 것을 보고 칼리굴라라는 별명이 붙여집니다. 가이우스는 이렇게 칼리굴라라고 불려지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합니다.

로마 병사의 신발 칼리

2) 위험한 유년기

게르마니아전쟁이후 다시 이탈리아에서 잠시 살다가 이제 아버지가 동방으로 파견됨에 따라 따라가게 되는데, 아버지 사후 티베리우스 사후 제위를 노리던 세야누스의 음모로 카이사르 직계들이 숙청되기 시작합니다. 이 당시 칼리굴라의 어머니인 대 아그리피나는 카이사르의 직계를 다 없애기 위한 티베리우스 황제의 음모라 생각해서 티베리우스와 계속 대립각을 세웁니다. 하지만 대립각을 중재할 소 드루수스가 마찬가지로 세야누스에게 암살당하자 더 이상 대 아그리피나를 막아줄 방어막이 없어진 것을 안 세야누스는 교묘하게 반역사건을 꾸며 칼리굴라의 어머니와 첫째형을 처형해 버립니다. 다행히 칼리굴라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인 리비아 드루실라의 보호를 받게 되는데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인 리비아는 막강한 권력과 뒷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분간은 숙청을 못했으나 마찬가지로 칼리굴라의 둘째형 드루수스 카이사르도 반역죄의 누명이 씌워져 숙청됩니다. 그럼 이제 누가 남나요?? 남자는 칼리굴라 밖에 남지 않은게 됩니다. 세야누스가 가만히 있었을까요?? 칼리굴라는 어떻게든 탈출해서 카프리 섬의 별궁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당시 황제 트라야누스에게 세야누스의 음모를 설명하는 편지를 몰래 전달하는데 성공해서 간신히 황제 옆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게 되죠. 물론 근위대장 세야누스는 몰락하게 되었구요.

티베리우스 황제

3) 후계자 시절

티베리우스는 카프레아이 별궁에서 칼리굴라의 후계자 수업을 하게 되는데 근위대장인 세야누스의 행패를 그냥 보고 있다가 문제가 되자 나선 티베리우스 처럼 세야누스 후임의 마크로에게 접근 협력 관계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 황제가 서거하자 후계자인 본인이 황제가 되게 되죠. 이 기간에 마크로의 협력 관계를 적극 활용합니다. 그래서 너무나 쉽게 단독 황제로 선출이 되게 되고 티베리우스 황제의 유언장은 휴지조각이 되어 버리죠. 그리고 로마를 떠나 카프레아이 별궁에 있었던 티베리우스의 인기가 높지는 않았기 때문에 로마 시민의 엄청난 환호를 받으며 황제에 취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묘히 정치적인 행위를 하죠 티베리우스를 신격화 해 달라고 요청을 한 것입니다. 당연히 인기가 없었던 티베리우스를 신격해 해줄 이유가 없었죠. 원로원이 거절하자 더 이상 요청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군인들에게 추가 상여금을 지원해서 군대의 환심을 삽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죠

공동황제 -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4) 황제

일단 자신주변의 친족들이 세야누스의 음모아래 많이 살해되었으므로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명예를 복권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로 인해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생전에 이들 부부가 명시적으로 적어놓은 본인의 할아버지 대 드루수스와 그 일가의 명예를 다시 회복시키게 되고 이를 정통성의 기반으로 활용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부모님 그리고 형제들의 명예를 확실하게 회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로마자체의 내정에 집중하게 됩니다. 경매세도 폐지하고 티베리우스가 막아놓은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유언장 집행도 제대로 하게 됩니다. 또한 그당시 발행했던 동전에 자신이 한 업적을 새겨넣음으로써 세습에 대한 불만을 줄여 나갔죠 이렇게 고도로 정치적인 행동을 통해 로마 시민의 인기를 얻은 칼리굴라의 앞은 창창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5) 중병

즉위한지 7개월째 칼리굴라는 이유를 알수 없는 고열과 두통으로 쓰러집니다. 간신히 회복은 되었지만 완전히 딱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의심병이 생기고, 환청도 들리게 되죠. 이러니 잠을 잘 수 있었겠습니까??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고 이때부터 기행을 일삼게 됩니다. 의심병이 도져 공동 왕위 계승자를 죽이고, 마크로의 부대도 숙청해 버립니다. 이 당시의 역사가들은 잔혹함에 눈돌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근위병으로써 권력을 쥐어가고 있던 마크로의 부대 숙청은 필수적입니다. 세야누스처럼 되어서 자기 친족을 또 학살할지도 모를 노릇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공동 황제를 제거한 것도 황권의 안정을 위해서 필요했습니다.

계속 황제와 율리우스 가문 위상을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이는 칼리굴라의 내정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불안했던 황제의 권위 향상을 위해 내정 전반에서 조금씩의 변화를 이끌어 냅니다. 즉 원로원을 견제하면서 자신가 율리우스가의 권위 신장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중병에서 회복되고 난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그래도 초기에는 그 정도가 정치적으로 봤을때도 무리가 없었다면 중병 회복 이후에는 위상 향상을 목적으로만 연회를 열다보니 인부에게 2000만원을 하사금으로 수여하고 희귀 동물을 구매하는등 그 정도가 과하게 됩니다. 이러한 칼리굴라의 행보는 더 폭이 넓어 지는데 주변 동맹국들에게 자신을 네오스 헬리오스 새로운 태양 로 묘사해서 동전에 새겨넣습니다. 그리고 황제 주도의 대규모 인프라 계획을 발표합니다. 당연히 이런 횡보가 보이면 어떻겠습니까?? 안그래도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는것에 화가난 원로원 의원들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죽을때 까지 암살시도에 시달리게 됩니다. 과거에는 이런 광폭 행보가 정치경험이 없는 칼리굴라의 실책으로 여겨졌지만 요즘에는 황제권을 확실하게 확립하여 자신을 지키도록 함으로써 오히려 더 현명한 처세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6) 후계계획

첫번재 아내가 사망한 이후 그리고 자신이 중병에 걸려서 죽다 살아난 이후 칼리굴라는 후계구도에 더 신경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끼던 여동생 드루실라 부부를 후계로 지목하는데…. 이게 여동생이 서기 38년 로마에 유행했던 열병에 걸리면서 사망하게 됩니다. 그러자 온갖 종류의 명예를 드루실라에게 주게 되는데 이게 근친상간 소문의 근원지가 되죠. 그리고 어떻게든 자신의 후계를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에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게 됩니다. 자 그러면 과연 처녀와 결혼했을까요?? 그 처녀가 아이를 생산한다는 보장이 없죠?? 그래서 출산경험이 있는 로마 귀부인들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이시기부터 계속된 원로원의 암살음모가 연속되게 됩니다. 게다가 거기엔 율리아 드루실라의 옛 남편 레피두스가 자신의 두 여동생과 공모해 암살사건을 벌인것도 포함됩니다. 이로인해 충격을 받은 칼리굴라는 반역이라는 단어에 꽂혀서 반역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가차없이 무자비하게 행동하게 됩니다. 두 여동생도 가차없이 처벌하게 되죠. 근데 이게 끝이 아니었으니…..

 

7) 계속되는 암살시도

칼리굴라의 암살시도는 끝이 없었습니다. 399월에 집정관의 암살시도, 40년에 정무를 보는 도중에 암살시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게다가 중병을 앓은 이후인데요 그때마다 로마에는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상수리 제도처럼 유력 귀족의 자제들을 황궁안에 인질로 잡아두기까지 하는데 문제는 이게 칼리굴라가 어린 소년/소녀를 좋아했다라는 소문과 결합해서 로마내 여론이 최악이었다는 점이죠. 거기에 여전히 원로원은 개무시하고 황권을 높여나가는 조치들을 노골적으로 합니다. 아예 원로원이 가지고 있던 조폐 발행권을 빼았고, 일부 속주의 총독 임명권 까지 빼앗아 버립니다.

 

8) 여러 원정

게르마니아 원정을 떠났습니다. 자신의 아버지의 원정을 마무리 하고 안정화 시킨다는 명분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브리타니아가 목표라고 근래에 밝혀집니다. 이전까지는 무계획적으로 군대를 일으켜서 점령하러 간다고 표현들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해석이 좀 다릅니다. 하지만 이때 성과가 미미해서 오히려 음모론을 더 키워주는 꼴이 되고 맙니다. 이후 숙부인 클라우디우스가 원정에 성공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우레타니아 현재의 모로코 를 병합해 버립니다. 이 당시의 후계자인 프톨레마이오스가 대단한 야심가였는데 이때만큼은 합심해서 프톨레마이오스가 로마에 정기적으로 인사하러 왔을때 틈을 봐서 암살해 버리고, 마우레타니아를 강제로 나눠서 힘을 못쓰게 만들어 버립니다. 물론 이전의 역사는 동맹국의 왕을 암살해 버린 말도 안되는 조치라 생각하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마우레타니아를 속주화 하는 과정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9) 암살

칼리굴라의 암살에 대해서는 여러 썰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칼리굴라가 공공 건축물 보수, 관리 업무를 살펴보고 국가 행사 준비를 확인코자 극장에 들렀는데 이때 이미 부정부패혐의로 곧 처형될 황실 관료로부터 동선을 파악한 카리에라 등 암살범 20명정도와 황제의 멘토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근위대와 경호대도 미처 대비를 못할 정도로 신속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 암살세력과 결탁한 원로원과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클라우디우스와의 숙명의 대결이 펼쳐지게 되죠

칼리굴라가 암살당한 극장과 복도

2. 평가

재위기간동안 한일을 되돌아 보면 자신의 부모와 친형제들이 숙청되는 것과 이것을 방관하다시피한 티베리우스를 보면서 황제의 자리에 완전히 오를 때 까지는 자신의 모습조차도 바꿔지낼 수 있을 만큼 때를 위해 기다릴지도 알았고, 제위에 올라 황실의 권위를 위해 노력하고 고도의 정치적인 행동을 수행한 능력있는 황제였습니다. 단 중병을 앓고난 이후 몇몇 의학자들은 뇌병변이라고 주장하긴 합니다. – 지나치게 원로원과 대립각을 형성하고 연속된 암살과정 중 그에대한 처벌을 가혹하게 함으로써 역사에 굉장히 한쪽만 부각된 황제중 하나입니다. 칼리굴라의 여러 악행에 대한 소문들은 2021년 기쁨의 정원 완벽발굴후 복원하면서 많은 부분 반박되었습니다.

단지 사람이다 보니 해결에 유연하진 못했습니다. 칼리굴라가 취한 원로원 강격책은 기사계급과의 관계 설정 측면에서 선대 황제 티베리우스와 많이 유사했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이 강경책 일변도여서 유연성이 많이 떨어지는 것이죠. 또한 황제 황실을 겨냥한 소문을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요즘 말하면 선전전에 밀린것이고 가짜뉴스에 침몰한 것이죠. 역사서에 나오는 칼리굴라 암살의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알렉산드리아로 수도를 옮긴다는 소문등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모습등은 경험 미숙이라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미숙한 점에도 불구하고 영리한 모습을 여러 번 보여줬고, 세금 징수나 행정관리 등에서도 로마황제 중에서 평타는 친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최근의 많은 연구들은 여러 고대기록들을 교차 검증하면서 칼리굴라가 악행만 저지른 군주라는 결론을 뒤엎고 있습니다. 단순히 어린 시절에 배운 내용으로 칼리굴라를 얼마나 함량 미달이고 잔인한 미치광이였으면, 4년도 안되어서 암살당하나??”는 식의 평가는 함부로 내리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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