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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1192 Richard I of England is captured and imprisoned by Leopold V of Austria on his way home to England after the Third Crusade.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가 삼차 십자군 전쟁 이후 귀국하던 중에 오스트리아의 레오폴드 5세 공작에게 붙잡혀서 감옥에 갇혔다.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는 사자왕이라고 불리는 영국의 역사에서 굉장히 유명한 국왕입니다. 3차 십자군 전쟁때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후 살라딘) 과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이며 전쟁 천재로 불렸던 왕입니다. 이 역사에서 언급이 되었듯이 어찌해서 3차 십자군 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떻하다가 같은 기독교 국가 귀족에게 잡히게 되었는지 간단히 알아봅시다.

리처드 1세의 상상도

1.  리처드 1

 

리처드 1세는 전쟁에서는 탁월한 전략가로써 이름을 터쳤지만 여러 잔혹행위등을 서슴지 않았고, 병적일 정도록 도덕적으로 무감각했으며, 심지어 몇몇 역사가들은 악마의 후손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습니다.

 

1) 유년기

115798, 헨리 2세와 에렐오노르 다키텐의 삼남으로 잉글랜드의 옥스퍼드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당연히 왕자에 맞는 다양한 교육을 받았는데, 다양한 학문을 섭렵했으며, 기사 작위를 받기위한 군사훈련도 같이 받았습니다.

 

2) 대반란 기간

헨리 2세는 차남 청년왕 헨리를 잉글랜드 왕, 리처드에게는 아키텐을 상속하고, 사남 제프리에게는 브르타뉴, 막내 존은 성직자의 길을 걷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헨리 2세는 이런 계획을 생각대로 진행시키지 못했고, 자식 교육에 소홀해져 버림으로써 결국 아버지와 아들들 사이는 갈라져 버리게 됩니다. 여기에 왕후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주도로 프랑스왕 루이 7세의 원조를 받기로 하면서 부왕 헨리 2세와 척을 지게 됩니다. 헨리 2세가 화해를 시도했지만 루이 7세가 완전히 틀어지게 함으로써 결국 한판 전쟁의 분위기가 흐르게 됩니다. 결국 1773년 여름, 동맹군이 노르망디를 침공하는데 왕후를 붙잡아 가두어 버리고 리처드를 동맹군에서 분리해 버린채로 헨리 2세가 대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때 루이7세가 눈치를 보다가 발빠르게 협상을 벌여 발을 빼버렸고, 리처드1세는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무릎을 꿇고 눈물로 사죄를 하면서 대반란은 마무리 되게 됩니다.

 

3) 아키텐 반란 진압

리처드는 이 전쟁의 여파로 자기 영지내에서 발생한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게 됩니다. 이 시대에 난공불락으로 여겨진 타유부르 성을 2주만에 함락시키면서 군사 지휘관으로써의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됩니다. 이때 헨리2세는 아들을 환영하게 되죠.

프랑스내의 영지

4) 형제들끼리의 다툼

리처드의 형과 동생들이 리처드의 영지인 아키텐으로 진격하게 되고 프랑스 왕세자는 용병을 지원하게 됩니다. 헨리 2세는 여기서도 해결 실패, 하지만 여기서 청년왕 헨리가 이질로 급사해 버림으로써 끝나게 됩니다. 이후 헨리 2세는 상속에 새로운 결정을 공포하는데 리처드에게서 아키텐을 뺏고 노르망디, 앙주 ,잉글랜드를 상속받는 것으로 해 버리죠. 이를 통해서 삼형제 사이에 극심한 갈등이 생기게 되었고, 결국 글으로 치달아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제프리에게서 계속 패하던 리처드는 11868월 제프리가 파리에서 급하사하게 되자, 리처드에게 기회가 찾아오게 됩니다. 헨리 2세는 어떻게든 존에게 제위를 물려주고자 했으나, 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리처드가 프랑스왕과 동맹해서 전쟁을 벌이게 되고,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결국 헨리 2세에게 굴욕적인 항복이랑 다름없는 조건들 받아내게 되고, 헨리 2세가 병사하자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

 

 

리처드 1세의 대관식

5) 숙청

형제들의 난으로 정치가 엉망이었으므로 조금이라도 다른쪽에 빌붙은 사람들은 잔학하게 정리해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나중에 붙은 인간도 토사구팽해 버리죠. 그리고 제 3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게 되죠

 

2. 3차 십자군 전쟁

살라딘과 벌인 3차 십자군 전쟁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나중에 따로 정리할까 합니다. 너무 길어요 리처드는 말도 안되는 무용담을 보여준적도 많고 이 전쟁에서 패한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살라딘으로 하여금 십자군을 쉽게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즈음 필리프 2세의 잉글랜드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음의 내용으로 살라딘과 강화를 하게 됩니다.

1)     이슬람의 예루살렘의 지배를 인정한다

2)     해안가에 기독교 마을을 공격하지 말것이며 신자들은 자유롭게 예루살렘에 왕복하는 것을 보장한다.

리처드와 살라딘

 

26년간이나 지켜졌던 조약입니다. 그리고 리처드는 잉글랜드로 돌아가게 되고, 살라딘은 5개월 후에 죽게 되죠. 리처드와 살라딘은 서로를 인정한 사이였습니다. 리처드가 살라딘을 위대한 왕이라고 평했으며, 이슬람 최고의 지도자라고 인정했기 때문이었죠.

 

3. 귀환

귀환의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온 데다가 배가 중간에 난파하여 비밀리에 유럽대륙을 가로지르게 되는데 , 이때 붙잡히게 됩니다. 여튼 십자군의 주축이었으므로, 결국 레오폴드 5세는 파문되지만…. 하인리히 6세는 돈이 되는 리처드를 놓치지 않습니다. 리처드가 잘 대처를 했지만 결국 영국 1년치 예상의 2~3배에 해당하는 보석금을 판결받습니다. 여튼 오랜 시일이 걸려 보석금을 마련하여 풀려난 리처드는 존의 반란을 진압하고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전쟁을 벌입니다. 프랑스내에 있던 대부분의 영지를 수복하지만 결국 이때에 사망하게 됩니다.

리처드1세가 처음에 갇힌 성

 

보석되어 풀려나는 리처드 1세

4. 평가

대부분 리처드라고 하면 전쟁광에 불과하다고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요즘에서는 리처드는 정치 외교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등용한 인물이나 하인리히6세와 재판때 많은 인맥을 닦아낸 것을 봐도 결코 전쟁만 하던 전쟁광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리처드 사후 필리프 2세가 프랑스내 영토를 수복하는 과정에서 리처드가 쌓았던 성인 샤토 가야르라는 성이 있었는데 필리프 2세가 이 성을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죠. 단순한 군사를 이끌고 싸움만 잘하던 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리처드 1세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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