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In Calendarium

 

In 1124 Pope Honorius II is elected.

 

1124년 호노리오 2세 교황이 취임하다.

 

교황의 등극은 서양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짧은 한줄이지만 호노리오 2세 교황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기로 합니다.

호노리오 2세의 모습

1. 교황선출 전

아몰라 근처 파냐노(Fagnano)에서 태어났습니다. 한때 볼로냐 부주교를 지냈습니다. 1117, 교황 파스칼 2세가오스티아와 벨레트리의 주교 추기경으로 임명하였습니다. 1119,  교황 칼리스토 2세는 그를 사절로 임명하여 독일로 파견하였습니다. 1122년에는 보름스협약에 참가하여 서임권 논쟁을 마무리짓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서임권은 대주교나 주교, 수도원장 등을 임명하는 성직 임명권을 말합니다. 보름스 협약에 대해 잠깐 언급하자면, 황제가 일방적으로 임명하던 방식은 없어집니다. 성직의 서임권은 교황이 가지고, 황제는 교회나 수도원의 봉토에 대하여 영주권을 가진다라는 내용으로 합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충 합의한 것이기 때문에 뒤에 여전히 문제의 소지가 있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자격자가 성직자가 되는 것을 막고 성직자가 되는 것이 굉장히 고난도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여튼 차근차근 카톨릭내에서 입지를 강화해 나갔다 정도로 아시면 될 듯 합니다.

프란지파니 가문이 다스리던 로마

2. 교황선출 과정

교황선출을 놓고 로마의 가장 영향력 있는 두 귀족 가문인 프란지파니 가문과 피에를레오니 가문 사이에 분쟁이 발생합니다. 프란지파니 가문이 스킨나베키를 지지하고 있었고, 피에를레오니 가문은 테오발도 부카페치를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스킨나베키가 교황으로 선출될 분위기가 형성되자, 피에를레오니 가문은 다급하게 부카페치를 교황 첼레스티노 2세로 옹립해 선수를 치게 됩니다. 당연히 자리를 빼았긴 상대편 가문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겠죠. 그래서 무력충돌이 벌어지게 되고, 교황의 자리가 난리가 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 부카페치가 교회의 분열을 원치않아 하루만에 퇴위해 버리고, 스칸나베키가 호노리오 2세로 선출되어 분쟁이 끝나게 됩니다.

 

3. 교황으로써

호노리오 2세는 교회 쇄신 정책을 펼쳤습니다. 보름스 협약을 통해 얻어낸 특권을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이를 더욱 확장하고자 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계승을 놓고 내전이 벌어지자 누가 정통성이 있는 황제인지를 판가름하는 결정권자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수도회인 베네딕도회를 불신하고 신생 수도회 아우구스티노회나 시토회의 괕은 신생 수도회들에게는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지 순레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성전 기사단을 공식적으로 허가했습니다.

성전 기사단의 창설 - 19세기 그림

4. 평가

호노리오 2세가 추진한 교회 내부의 정책은 나름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외교는 꽝이었죠. 시칠리아 왕국이 이탈리아 남부까지 영향력을 끼치는 것도 막지 못했고, 프랑스 왕국의 교회 간섭도 딱히 다른 방안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교황이 막는데 실패한 시칠리아 왕국의 루제루 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