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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69, Vespasian, formerly a general under Nero, enters Rome to claim the title of Emperor.

 

69년에 네로 치하하에서 장군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에 입성해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다.

베스파시아누스황제 흉상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얘기가 나오는군요.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 황제 사후에 벌어진 내전인 네 황제의 해의 최후의 승자가 되어 황제에 등극했고 이후 세습왕조인 플라비우스 왕조의 창건자 입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플라비우스 원형극장 즉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콜로세움의 건설을 명령한 황제입니다. 평가는 굉장히 좋습니다. 황제로서의 능력도 매우 뛰어나서 재위 계승에 대한 법률을 제정해 이전까지의 로마 제정의 세습 체제를 확고히 굳히고, 200년대에 펼쳐진 팍스 로마나의 기반을 만든 명군으로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건설을 명한 콜로세움

1. 출생

베스파시아누스는 AD9년 이탈리아 레아테 근교의 팔라크리나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요즘으로 치면 제 3금융권 즉 사채, 추심, 압류를 전문으로 하는 직업을 가지고 계셔서 평판 자체는 좋지는 않았습니다. 평민이었기 때문에 이전까지 단 한명의 공직자를 배출하지 못한 그야말로 생소한 무영의 가문에 불과했던 거죠. 하지만 일단 사채업을 한다는 것은 많은 돈을 만질 수 있다는 얘기죠. 따라서 베시파시아누스는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출세

1) 가이우스 황제기

충분한 교육후 일단 형부터 먼저 출세를 하게 됩니다. 형 사비누스가 먼저 원로원 의원에 임명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죠. 어머니는 이 사실을 가지고 베시파시아누스를 놀렸는데 그 스트레스가 심해서인지 기사계급의 가문의 딸이었던 도미틸라와 결혼한 후, 로마군 장교로 입대해 복무해버립니다. 그리고 이때가 티베리우스 황제가 죽고 가이우스 칼리굴라 황제가 갓 즉위한 때인 37년에 회계감사관을 시작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집안이 사채업을 하는 집안이니 돈과 관련된 일은 일찍이 적응을 마친 베스파시아누스는 직무 평가가 굉장히 좋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도 집안의 배경으로 인해 원로원에 의해 조영관(안찰관)에서 밀려나게 되죠. 하지만 운명의 장난일까?? 이때 황제는 그 유명한 가이우스황제 원로원과 황제 사이에 권력다툼이 그야말로 극심했던 시기였고, 황제는 원로원과 사이가 좋지 않을법한 베스파시아누스를 눈여겨 보게 되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출세를 하게 됩니다.

황제의 지원으로 누구보다도 빨리 법무관에 임명이 되었고, 이걸 계기로 원로원 입성의 계기를 얻게 됩니다. 누구보다도 변덕스러웠던 황제에게도 굉장히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이렇게 황제가 밀어주니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에 충성을 다 바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법무관의 임기를 마치는 날인 가이우스 황제가 근위대장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생깁니다. 그래서 가이우스 황제의 삼촌인 클라우디우스가 왕제로 옹립이 되죠. 하지만 이때에도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에 대한 충정을 드러냅니다. 반역죄를 언급을 한 것이죠. 이때 원로원이 공화정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왠만한 간덩이가 아니면 이런 말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시기 클라우디우스가 24시간도 되지 않아 혼란을 수습하고 군대도 장악한 다음 원로원에 출석합니다.

 

2) 클라우시우스 황제기

근데 이 사건이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로부터 가이우스 황제의 측근이고 친황제파로 눈도장을 제대로 찍게 됩니다. 그래서 정부측 인사의 천거로 게르마니아에 주둔 중인 제2군단의 군단장에 임명됩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가이우스와 클라우디우스아래에서 엄청난 양의 행정과 군사적인 경험을 쌓게되고, 특유의 성실함과 꼼꼼함 그리고 충성심등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황제가 바뀌었음에도 계속 승승장구 합니다.

 

3) 네로황제기

네로 황제때는 잠시 위험을 겪습니다. 황제의 시 낭송회때 감히 졸아버린 것이죠. 사형에 처해질 뻔 하지만 간신히 유배로 끝납니다. 하지만 네로도 베스파시아누스의 능력을 높게 샀기 때문에 결국엔 재등용되게 됩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능력을 인정받아서 로마의 여러 속주에서 다양한 공적을 쌓게 됩니다. 그리고 네로 치세 말기에 유대 지역에서 종교적 민족주의 세력인 열심당에 의해 발생한 유대 독립전쟁이 너무 크게 벌어지면서 시리아 속주로 파견이 됩니다.

독립전쟁을 진압하러 가는 베스파시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인의 독립전쟁을 벌여 유대 북구 갈릴레아 지역을 점령하고 요셉이라는 유대인 지도자를 포로로 잡습니다. 이 요셉은 로마인으로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되는데 로마와 유대 간의 절충안을 제시하고, 그다 황제에 오른 이후에 유대 지역을 무리없이 통치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반란을 제압하던중 네로가 자살하게 되고 시리아 속주 총독과 로마의 동방관리들 동맹국 국왕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게 됩니다. 이후 네로이후 황제에 오른 비텔리우스를 베시파시아우스 황제를 지지한 도나우 군단장이 살해해 버리고 로마를 평정하게 됩니다. 이제 본격적인 베스파시아누스황제는 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하게 됩니다.

 

3. 치세

4황제 시대의 지도

황제가 되고 난 이후 네 황제의 해라고 불리는 혼란시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을 다했습니다. 이때 최대한 보복은 자제했습니다. 그러며 아우구스투스가 했던 방법으로 고도의 정치적 계산으로 행동을 했는데 이때는 본인의 장남을 내세웠습니다. 자신은 관용을 베풀어서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자신의 장남이 철저하게 기존 권력의 숙청을 담당하게 하는 방법으로 권력을 공고히 하면서 네 항제 시대를 서서로 마무리지어 나갑니다. 그리고 원로원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황제 직속의 행정부의 기능을 강화시켰으며,, 자신의 장기였던 재무에 있어서는 네로황제가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던 국고를 자신의 검소한 생활과, 세금문제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지 않으면서 회복시켰습니다.

속주의 운영과 군대의 운영도 개혁대상이 되었습니다. 국경지대에서 일부 부대들에게서 그 지역에서의 군단병, 보조병 모집 관행을 폐지하고, 본국 출신 이탈리아 혈통 장교들을 대거 배치함으로써 속주에서의 반란 가능성을 차단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본국의 정규병력 수의 감소를 속주출신들도 정규군 모집대상으로 입대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로마의 속주였지만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는 속주주민들을 달랜다는 뜻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시민권 권역을 꾸준히 확장해 나갑니다. 시민권이라는 권리도 있지만 당연히 세금을 내어야 할 의무가 있죠. 이때 거둬 들여진 세금은 나중의 팍스로마나의 기초가 됩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새겨진 동전

4. 사망

79년 봄 베스파시아누스는 고된 직무를 계속해오다 감파니아를 순시하던 도중에 열병에 걸립니다. 치료가 소용이 업성ㅆ고 69세의 나이로 눈을 감게 됩니다. 유머 감각이 강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습니다. 죽기직전에도

 

이보게, 내가 신이 되어가고 있는 거 같아.”

 

라고 말하면서 눈을 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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